상세정보
율곡 철학, 가장 조선인다운 조선인 율곡 이이의 철학사상
미리보기

율곡 철학, 가장 조선인다운 조선인 율곡 이이의 철학사상

저자
탁양현 저
출판사
e퍼플
출판일
2019-01-04
등록일
2020-04-23
파일포맷
EPUB
파일크기
0
공급사
예스이십사
지원기기
PC PHONE TABLET 웹뷰어 프로그램 수동설치 뷰어프로그램 설치 안내
현황
  • 보유 1
  • 대출 0
  • 예약 0

책소개

제1장. ‘栗谷 李珥’는 누구인가



1. 性理學者 ‘율곡 이이’

‘李珥(1537~1584)’는, 朝鮮王朝를 대표하는 文臣이자 性理學者이다. 本貫은 德水, 字는 叔獻, 號는 栗谷이다. 관직은 吏曹判書에 이르렀다. 諡號는 文成이다.
西人의 領袖로 추대되었으며, 이언적, 이황, 송시열, 박세채, 김집 등과 함께 文廟從祀와 宗廟配享을 동시에 이룬 6賢 중 한 사람이다.
9차례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九度壯元公이라는 별칭을 얻을 만큼, 조선왕조 최고의 秀才였다.
16세 때 어머니 申師任堂이 죽자, 3년간 여묘살이를 한 후, 아버지가 계모 권씨를 들인 뒤, 금강산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는데, 이 때문에, 훗날 그가 죽은 후에까지도,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려다가 환속한 사람’이라고, 東人과 南人이 공격하는 빌미가 되었다.
그나마 李珥 정도의 강력한 보수주의자인 탓에, 승려 생활과 佛學에 대한 修學을 비판의 빌미로 삼는 정도에서 끝난 것이다.
그런데 예컨대, 尹?, 朴世堂 등은 朱子學에 대해 異見을 제기한다는 사실만으로 斯文亂賊이 되었으니, 율곡과는 좋은 비교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모름지기 조선왕조에서 통치 이데올로기로서 작동하는 ‘性理學的 朱子學’에 대해서는, 字句 하나도 달라서는 안 된다. 그러니 그야말로 ‘이데올로기스러운’ 이데올로기라고 할 것이다.
이렇게 ‘이데올로기스러움’은, 북한의 主體思想에서 여실히 재현되고 있다. 白頭血統과 勞動黨의 獨裁에 대해서는 한치의 어긋남도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2. ‘10만 양병설’을 주장하다

율곡은, 當代를 개국 이후, 오랜 안정과 50여년간 이어진 四大士禍의 혼란 및 을사사화 이후, 20여년간 이어진 외척정치로 인해, 사회전반에 걸쳐 모순과 부패가 심화된 상태로서, 시급히 경장하지 않으면 곧 土崩瓦解의 결과에 이르게 될 위기로 진단하고, 이에 구체적인 개혁의 두 축으로 貢案 개정과 軍政의 개혁을 제시하였다.
이를 위해 愛民, 畏民의 마음으로 세금과 ?役을 줄여 가볍게 해주며, 형벌을 신중히 하며, 절약하여 재물을 풍족하게 만들고, 백성에게 恒産이 있게 한 다음, 軍政을 닦음으로써, 興利除害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그 삶을 즐기게 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던 것이다.
율곡의 양병설은, 安民을 위한 그의 도학적 경세설의 필수적인 요소이며, 또한 양병을 위해 양민, 군사훈련, 인재등용, 교화를 다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양병설은 養民을 우선으로 하는 도학적 양병설이며, 군사훈련, 인재등용, 교화를 갖춘 精兵論이었으며, 輔國安民이라는 그의 衷情으로부터 나온 시의적절한 대책이었다.
그러므로 율곡의 양병설이 백성들을 동요하게 하여, 오히려 화를 기르는 것이 될 것이라는 당대의 비판이나, 십만 양병을 비롯한 그의 양병설을 날조된 것이라고 糊塗하거나, 혹은 당시의 국력으로 보아 현실성이 없는 空論이었다는 근래의 주장 등은 모두 적합한 비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율곡 양병설과 그 도학적 특징, 장숙필, 율곡사상연구.

李浚慶이 죽기 직전 朋黨의 弊害에 관한 遺箚를 올리자, ‘죽음에 이르러 말이 惡하다’고 공격하였으며, 이후 이준경의 처벌까지 가기도 했다. 그러나 후일 黨爭이 현실화하자, 스스로 크게 뉘우치고서, 東人과 西人 사이의 당쟁 조정을, 평생의 정치 이념으로 삼았다.
貢納의 폐단 是正策인 代貢收米法 실시를 주장하고, 병조판서로서 여진족 尼湯介의 침입을 격퇴한 후, ‘10만 양병설’을 주장해 임진왜란을 예언했다는 명성을 얻었다. 이이는, 선조에게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여, 東人의 반감을 사기도 하였다.
그는 일본의 戰國時代는 종결될 것이며, 일본을 통일할 ‘사무라이’는, 일본 내 세력 내 갈등 완화와 국내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목적으로, 未久에 명나라나 조선을 침공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본의 도발에 대한 대응으로, 그는 10만 명의 정병을 양성하여 일본의 침략에 대비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견해는, 동인에 의해, 왕을 현혹하기 위한 발언으로 치부되었고, 西人조차 그의 생각이 지나친 상상력과 허언이라며 호응해주지 않았다. 이이가 10만 양병설을 주장하던 당시, 조선의 총 병력수는, 장부상으로는 30만 명이 넘었으나, 실제 전투 가능한 병력 숫자는 1,000명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은 이이는, 1582년 이조판서와 형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에 임명되어, 여진족의 반란을 진압하였고, 大提學을 역임하고 右贊成에 올랐다.
이듬해 당쟁의 조정을 시도하였으나, 오히려 탄핵을 받아 일시 퇴직되었다가, 다시 이조판서가 되는 등, 반대파의 탄핵에 시달리느라, 제대로 경륜와 소신을 펼칠 만한 기회는 부족하였다.
그런데 이이의 ‘10만 양병설’에 관해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학자도 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10만 양병설’은 당시 조선의 사회적, 경제적 능력으로 보았을 때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사안이었으며, 그러한 한계를 분명히 파악하고 있던 실무적 유학자인 이이로서는, 오히려 ‘10만 양병설’을 주장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고 한다.
실제로 이이가 올렸던 상소문과 각종 글을 모은 문집을 살펴보면, 당대 다른 중신들도 즐겨 쓰던 養兵이란 글자는 나올지언정, ‘10만 양병’에 관련된 내용은 일체 나오지 않는다고 하며, 오히려 군축을 해야 한다는 상소문이 십만양병설 대신 자리 잡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어 덧붙이기를, ‘10만 양병설’에 관련된 내용은, 후대에 세워진 율곡 이이를 기리는 비문에 처음으로 등장한다고 하며, 이는 율곡 이이를 숭배하던 후대 조선 유학자들이, 일종의 신성화를 노려 임의로 추가하였다고 한다. 이에, 후대에 행해진, 일종의 歷史美化인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栗谷全書에 의거하여 살핀다면, 율곡이 평생토록 조선왕조의 유지를 위해 국방과 경제를 강조했음은 의심할 나위 없다.


3. 엘리트 士大夫 가문에서 태어나다

율곡 이이는, 1536년 강원도 강릉부 죽헌동에 있는, 外家인 烏竹軒에서, 덕수 이씨 통덕랑 사헌부감찰 ‘이원수’와 평산 신씨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오죽헌 별채에서 태어났는데, 신사임당이 胎氣를 느끼게 된 계기가, 黑龍이 바다에서 하늘로 오르는 꿈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그가 태어난 방은 夢龍室이라 일렀고, 아이 때의 이름은 ‘현룡(見龍)’이라 지었다가, 뒤에 珥로 바꾸었다.
이후 경기도 파주에 자리한 本家로 와서 생활하였다. 이이의 아버지 이원수는 사헌부 감찰, 수운 판관과 통덕랑을 지냈으며, 중종 때의 형제 정승인 경재 이기, 용재 이행의 5촌 조카였는데, 이기는 의정부영의정을, 이행은 의정부좌의정을 각각 지냈다.
또한 종숙(당숙) 이기와 이행은 당대의 실권자들이었고, 그들은 외가쪽으로는 生六臣 성담수, 성담년의 조카이고, 死六臣 성삼문의 외종조카들이었다. 그러나, 아버지 이원수는 통덕랑 사헌부감찰에 이르렀다. 벼슬이 낮았던 아버지 이원수는 승진하고자, 일부러 당숙이자 김종직의 문인이며 글을 잘 썼던 이기의 문하에 출입했으나, 부인인 신사임당의 권고로 그만두었다.
野史에 의하면, 신사임당이 남편 ‘이원수’에게 ‘이기’의 집에 출입하다가 화를 당할 것이라고 경고했는데, 과연 ‘이기’는 청렴했고 글도 잘 지었으며, 벼슬이 의정부 영의정까지 이르렀지만, 乙巳士禍에 가담한데다, 권력을 남용한 탓에, 명종 말엽 官爵을 削奪 당했다.


4. 親母 申師任堂과 庶母 權氏

어머니 申師任堂은, 학문적 소양이 깊었고, 시문과 서화에 능했다. 또한 어머니 신사임당은, 높은 덕을 지닌 인격자였을 뿐만 아니라, 절개가 굳고 시부모를 잘 섬긴다고 칭송을 받던 인물이었다. 이러한 어머니를 두었던 이이는, 어려서 어머니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이런 교육환경 덕에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였다.
그의 외할아버지 진사 申命和는, 조광조 등과 가까이 지냈으며, 己卯士禍 때의 의리를 지켜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외할아버지 신명화는, 아들이 없이 딸만 여럿 두었는데, 딸들에게도 유교, 성리학을 가르치고, 공자, 맹자, 주자의 도리를 가르쳤다.
이원수는 신사임당 외에도 권씨라는 첩을 한명 더 두었다. 庶母 權氏는 酒母 출신으로 술주정이 심하였는데, 신사임당에게는 근심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사임당이 세상을 떠난 뒤, 권씨는 이이를 괴롭혔으나, 그는 원한을 품지 않고 서모를 극진히 모셨다.


5. 타고난 神童이며 빼어난 孝子였던 ‘율곡 이이’

李珥는 어려서 神童이라 불렸다. 그는 生後 1년도 안 되어서, 말과 글을 깨우쳐 주변을 놀라게 하였는데, 3세 때에 이미 글을 깨우쳤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 신사임당의 글과 그림을 흉내낼 정도로 놀라운 天才였다. 이이는 4세 때 중국의 역사책인 史略의 첫 권을 배웠는데, 가르치는 스승보다도 더 토를 잘 달았다고 한다.
이러한 묘사는 지극히 小說的이다. 물론 율곡 이이의 天才性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겠지만,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유치원생 쯤의 나이에 언어를 터득하고, 더구나 스승보다 史略의 토를 더 잘 달았다는 대목은 당최 신빙성이 없다.
그러니 스승이 유치원생 보다 무식했거나, 지나친 과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아래에 기술되듯, 더없는 효자였다고 한다. 타고난 신동이면서도 빼어난 효자였다고 하니, 역사란 것이 어떤 식으로 기록되는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것이다.
여하튼 이이는,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5세 때에 어머니 신사임당이 병으로 자리에 눕자, 외할아버지의 위패를 모신 사당에 홀로 들어가 매일 1시간 동안 기도를 올릴 정도로, 어머니를 아끼는 마음이 컸다. 행방불명이 된 이이를 찾던 가족들은, 외조부 신명화의 사당에 엎드려, 어머니를 낫게 해달라는 어린 이이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는 탄복하였다 한다.
또 11세 때에는, 아버지 이원수가 병으로 자리에 눕자, 이이는 칼끝으로 자기의 팔을 찔러 흘러내리는 피를, 아버지의 입에 넣어 드렸다고 한다. 그리고 사당에 들어가,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고 한다.

-하략-

QUICKSERVICE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