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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를 꿰뚫는 질문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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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를 꿰뚫는 질문 29

저자
김태웅,김대호 공저
출판사
arte(아르테)
출판일
2019-03-07
등록일
2020-04-23
파일포맷
EPUB
파일크기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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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3·1운동 ·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자주적 개혁 의지와 외세의 위기 사이에 가려진
근대의 진짜 모습을 드러낸다!

한국 근대사 전문 역사학자가 가려 뽑은 29개 핵심 질문과 치밀한 대답!

6300명 구독, 오디오클립〈역사탐구생활〉 출간!
현재 쟁점과 최신 연구 성과를 포함한 리.얼.한.국.근.대.사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역사학자 신병주 추천!

네이버 오디오클립 ‘역사탐구 생활’을 참 재미있게 들었다. 책으로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매번 했다. 드디어 나왔다.
_김정운 (문화심리학자)


『한국 근대사를 꿰뚫는 질문 29』는 한국 근대사를 명쾌하게 소개하고 그 의미를 쉽게 전달해 주면서 새로운 방식의 역사책의 면모를 보인다.
_신병주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 도서 소개

1863년 고종 즉위부터 1919년 임시정부 수립까지
우리가 알고 싶던 진짜 한국 근대사를 만난다!

〈말모이〉(2018), 〈박열〉(2017), 〈군함도〉(2017), 〈밀정〉(2016), 〈동주〉(2016), 〈암살〉(2015). 이 영화들은 한국의 일제 강점기를 다룬다. 특히 일제의 엄혹한 지배하에서 한국의 정신과 문화를 지키고, 결국에 영토와 주권을 되찾기 위해 싸웠던 조상과 순국선열 들을 기리며 대중적으로 흥행에 성공했다. 또한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이 호평 끝에 종영하면서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의병 운동에 대한 관심도 치솟았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해 유관순 열사의 아우내 장터에서의 3.1운동 이후 1년을 담은 〈항거: 유관순 이야기〉(2019)가 개봉하고, 곧 안중근의 일대기를 담은 드라마도 방영될 예정이다.
한국 근대사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진 분위기 속에서 다양한 당대의 사건과 인물들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지만 한국 근대사의 과정은 조선 몰락의 역사로 그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고자 개항이 시작된 1860년대에서 대한제국시기를 거쳐 주권을 상실하게 된 1910년과 1919년의 3.1운동까지, 한국의 근대라고 불리는 이 시기를 치밀하게 다룬 『한국 근대사를 꿰뚫는 질문 29』가 나왔다.
한국 근대사는 강력한 힘의 논리와 그에 저항하는 움직임의 연속이었다. 『한국 근대사를 꿰뚫는 질문 29』은 당시 한국의 지배계급과 지식인, 민중 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이 격동의 시간을 어떻게 경험하고 변화에 대응했는지, 외세의 침입에 국가는 어떻게 반응했으며 무엇을 우선시했는지, 일제의 경제·정치·문화적 침략에 우리 민중들은 어떻게 저항하고 무엇을 지키고자 했는지 다각도로 살펴본다. 한국 근대의 동학dynamics을 큰 그림으로 다루면서도 각 사건에 대해 새롭게 질문하고 대답함으로써 당대의 복잡성을 잘 드러낸다.

핵심을 파고드는 질문과 폭넓은 대답으로
한국 근대사를 이해하는 관점의 폭을 넓힌다!

『한국 근대사를 꿰뚫는 질문 29』는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워 어렴풋이 알고 있던 근대사 지식을 훌쩍 넘어선다. 우선 『한국 근대사를 꿰뚫는 질문 29』가 다루는 시기는 고종이 즉위한 1863년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까지 50여 년의 기간이다. 반세기를 겨우 넘은 이 짧은 기간에 우리는 왕조에서 제국으로, 민주공화국을 선포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한국 근대를 주제로 하는 많은 개설서가 1863년에서 1910년까지를 한 단위로 묶고 조선의 멸망을 통해서 해당 시기를 조명하면서, 한국 근대사는 망국을 초래한 어둠과 아픔의 역사로 여겨지곤 했다. 『한국 근대사를 꿰뚫는 질문 29』는 “봉건과 외세라는 이중의 위기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했으며, 무엇을 이루려 했나?”라는 질문에 답함으로써 한국의 근대가 품고 있던 많은 가능성들을 최대한 드러내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질문의 전환은 이후에 일어난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이라는 기념비적인 순간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또한 ‘한국 근대사를 꿰뚫는 질문 29’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핵심 질문 29개를 던짐으로써 기존 역사적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고 이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본다.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우리의 근대를 들여다보기 위한 도구로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고민을 담고 있는 질문 29개를 던지고, 이 질문을 풀며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의 출발점으로 되돌아가 보려고 노력했다.
‘조선은 왜 닫힌 빗장을 열었을까?(2장)’, ‘김옥균, 혁명가인가 반역자인가?(3장)’, ‘대한제국은 어떤 나라를 꿈꾸었는가?(10장)’ 등의 질문들을 던짐으로써 개방과 쇄국이라는 이분법적 사고, 당대 개혁 세력의 복잡성, ‘망국’이라는 결과로부터 소급하여 근대사를 바라보는 결과론적 사고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근대를 이해하는 폭넓은 관점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 책은 정치사를 위주로 서술하되 사회 경제 변동을 자세히 다루면서 근대의 변화가 당시 한국인들의 삶에 미친 영향을 다각도로 보여 주려고 했다. 아울러 일본과 중국을 통해 도입된 서구 문화가 오늘날 한국인의 삶에 크게 자리 잡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 문화의 유입과 변용 과정을 소개했다. 또한 학계의 통설을 바탕으로 삼되 되도록이면 최근의 연구 성과를 적극적으로 반영했고, 특히 국문학계와 미시사 연구의 성과도 활용하여 근대 한국인의 어문 생활과 대중문화도 담고 있다.

6300명이 구독한 오디오클립, 〈역사탐구생활〉을 더 풍성하게!
검증된 콘텐츠로 쌓아 올린 한국 근대사 결정판

『한국 근대사를 꿰뚫는 질문 29』는 2017년 9월 7일부터 2018년 10월 25일까지 60회 연재한 네이버 오디오클립 〈역사탐구생활〉과 함께 기획되었다. “역사를 알고 싶었으나 책은 너무 벅차고 어디서부터 읽어야 제대로 읽는 건지 모르겠다.”, “역사 무지렁이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고민을 지닌 많은 청취자들이 〈역사탐구생활〉을 반겼다. 이 책은 〈역사탐구생활〉에서 시도한 질문과 답이라는 포맷을 그대로 가져오되, 방송에서 다루지 못한 내용까지 충실히 담았다. 각 장의 끝에 배치한 ‘이것만은 꼭!’이라는 별도의 질문은 역사를 사유하는 감각을 하나하나 흔들어 깨우는 친절한 길잡이가 되어 준다. 또한 책에서 언급된 관·외세·민간의 굵직한 사건들을 연표로 제작해 사건들의 얽힘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했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역사의 해’ 2019년. 『한국 근대사를 꿰뚫는 질문 29』를 통해 리얼 한국 근대사를 만나자!




◎ 추천사

서울과 여수를 오가는 기차 안에서 네이버 오디오클립 〈역사탐구생활〉을 참 재미있게 들었다. 책으로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매번 했다. 드디어 나왔다. 사실 우리는 근대사에 관해 너무 무지하다. 일제 식민지로 전락해 가던 그 역사가 부끄럽고, 마음 아파서 외면했다. 그런데 바로 그 문제를 이 책은 손톱으로 후벼 파듯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태정태세 문단세~’ 따위 한숨부터 나오는 역사 이야기가 아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격변기를 겪었던 이 땅의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에 대한 의문을 다양한 시각에서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해 준다. 오늘날 일본의 태도에 화가 날수록 우리 근대사를 잘 알아야 한다. 참으로 시의적절한 책이 나왔다!

_김정운 (문화심리학자)



『한국 근대사를 꿰뚫는 질문 29』는 한국 근대사를 명쾌하게 소개하고 그 의미를 쉽게 전달해 주면서 새로운 방식의 역사 책의 면모를 보인다. 중요한 테마에 대해 답을 주는 방식으로 고종이 즉위한 1863년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까지, 50여 년의 역사를 소개해 준다. 29개 각 장 제목을 비롯해서 각 장을 구성하는 세부 내용의 제목까지 모두 질문으로 시작하여 독자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이 질문을 풀어 가는 과정을 통해 근대의 역사를 이해함과 동시에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로 돌아가기도 한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다. 오늘날과 가까운 근대의 역사는 특히 우리들이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부분들이 너무나 많다.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를 맞이하여 출간되는 이 책을 통해 역사가 던져 주는 생생한 감동을 직접 체험해 보기 바란다.

_신병주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 책 속으로

오늘 우리는 또 다른 역사의 분기점에 서 있습니다. 100여 년 전 선열들이 불굴의 의지와 뜨거운 열정에도 불구하고 미처 해결하지 못한 많은 과제들은 무엇일까요?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또 100년 뒤 우리 후손들은 우리를 어떻게 바라볼까요? 늘 들어 왔던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법고창신法古創新을 다시 떠올리는 가운데 오늘을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독자들과 더불어 3·1운동 100주년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100년 전 선열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우리의 귓가에 쟁쟁하기 때문입니다.

_머리말 p. 9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 개화파 인사들은 청의 내정간섭과 청에 의존하는 조선 정부의 사대 방침에 반발했습니다. 1882년 박영효가 임오군란을 처리하기 위해 일본에 수신사로 가게 된 뒤부터 이들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됩니다. 김옥균, 서광범 등도 이 사신 행렬에 동행했습니다. 박영효 일행은 일본에서 융숭한 대접과 함께 임오군란의 배상금 탕감이라는 선물을 받습니다. 또한 이들은 일본의 대표적인 문명개화론자인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난 뒤, 그의 지원 약속을 받고 일본의 문명개화론을 수용하게 됩니다. 이 선택이 그들을 온건 개화파와 갈라지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였습니다.

_3장 김옥균, 혁명가인가 반역자인가? pp.61~62



청은 시모노세키조약에 따라 조선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조약에 명시된 ‘자주독립’이라는 표현은 청을 대신해서 일본이 지배하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청일전쟁이 시작됨과 동시에 일본은 ‘조일잠정합동조관’을 체결해 경부선과 경인선의 철도부설권 및 군용전신선 관할권 등의 이권을 일본에 양도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조일공수동맹조약’이라는 것을 체결해서 조선이 일본의 동맹국으로서 일본군의 이동과 식량 준비 등을 위한 편의를 제공하도록 했고, 일본 고문관과 군사교관을 조선 정부 내에 배치한다는 약속을 조선 정부로부터 받아 냈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모두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드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법적 근거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_6장 청일전쟁, 누구를 위한 전쟁이었는가? p.127



우선 왕비를 부르는 공식 명칭에 대한 문제부터 풀어 보겠습니다. 조선 시대의 왕비를 지칭하는 명칭은 바로 ‘왕후’입니다. 숙종 때 장희빈과 대립했던 인현왕후나 영조의 어린 아내이자 정조의 할마마마로 유명한 정순왕후에서 그 명칭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왕후의 명칭 뒤에 성을 붙여서 인현왕후 민씨, 정순왕후 김씨 등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조선왕조의 전통에 따르게 되면 고종의 아내는 ‘명성왕후’ 또는 ‘명성왕후 민씨’가 가장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_8장 명성왕후는 왜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했는가? p. 164



한·청·일 동아시아 삼국이 세계 질서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식민지·반식민지·제국주의로 그 운명이 갈라진 이유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논쟁이 진행되었습니다. 이러한 차이가 발생한 까닭이 각 국가의 내부 역량 차이라고 주장하는 견해와, 국제 질서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세 나라에 가해진 외압의 차이라고 주장하는 견해로 나뉘어 서로 치열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1960년대에 어느 일본 학자는 이를 ‘30년간의 논쟁점’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이 논쟁은 아직까지 명확하게 해결되지 않았고, 21세기가 된 지금도 우리는 이 문제를 여전히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가 일본에서 처음 제기되었던 때를 고려하면 조만간 100년을 바라보게 되고, 광무개혁 논쟁이 시작된 1976년을 기준으로 보더라도 40년을 훌쩍 넘겼습니다. 이 논쟁은 과연 해결이 가능할까요? 만약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면 우리는 이 논쟁을 통해 무엇을 얻어야 할까요?

_12장 고종, 현명한 군주인가 어리석은 군주인가? p. 261



원래 장지연은 이토의 열렬한 지지자였습니다. 1902년 『황성신문』 사장에 취임한 후 한·청·일 삼국이 연대해서 서양의 군사적·문화적 침략에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개신 유학자로서 1898년 이후 청이 서구 열강에 분할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그는 현실적인 대안을 찾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장지연은 가장 부강한 일본을 중심으로 황인종 삼국이 뭉치면 백인종의 침략을 능히 막아 낼 수 있다는 이토의 동양 평화론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게 되었고, 『황성신문』을 통해 동양 평화론을 널리 전파시켰습니다.

_17장 대한제국의 언론은 국망의 위기와 어떻게 싸웠을까? p. 343



이후 의병 운동의 성쇠 여부는 이러한 신분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는가가 관건이었습니다. 이에 한말 의병 전쟁의 시기를 나눌 때 의병들이 봉기했던 연도를 기준으로 흔히 을미의병·을사의병·정미의병 등으로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이러한 시기 구분은 의병이 언제 일어났는지 파악할 때는 유용하지만, 의병 전쟁의 성격과 변화 과정을 제대로 보여 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연대기로 분류하는 것보다 이 의병 전쟁을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의병 활동의 변화와 연속성을 유기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의병 운동을 전기와 후기로 구분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1895년 전후 일어난 의병 활동은 아관파천으로 사실상 종료되기 때문에 이후 의병이 다시 등장할 때까지는 무려 7년이라는 공백이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또한 두 시기는 의병이 봉기했던 정치적 환경이 달랐을 뿐만 아니라 의병 운동의 주도 세력과 참가층의 구성에서도 큰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_19장 의병 전쟁은 어떤 유산을 남겼을까? p. 380



고종은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인해 곤경에 처했고, 통감부와 친일 내각의 ‘가짜 양위식’으로 강제 퇴위되었습니다. 우리가 역사 수업을 통해 알고 있는 고종의 활동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러나 강제 퇴위 후에도 고종이 후기 의병을 적극 독려하고 지원한 사실이 통감부 문서에 자세히 전해집니다. “궁중의 잡배들이 (황제의) 밀칙을 받들고 재야의 야심가와 비밀히 공모하여 각 방면에서 종종의 운동을 하고 있다. …… 또 잡배들을 끌어들여 의병을 선동하여 음으로 일본에 반대 행위를 하였다.”에서 볼 수 있듯이, 고종은 밀칙으로 의병을 일으키고 활동 자금을 지급해 그들을 후원하면서 후기 의병의 전국적인 활동을 배후에서 지원했습니다.

_20장 고종은 왜 헤이그 특사라는 승부수를 던졌을까? p. 404



순종의 병합 조칙이 공포되었던 8월 29일에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서 별다른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을사늑약이나 정미7조약 때와 대조적으로 전국이 조용했던 까닭은 선동자 한 사람도, 선동 문자 한 구절도 나오지 못하도록 데라우치가 지휘하는 통감부가 철저하게 막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일제는 강제 병합에 대한 국제적인 비난이 나타날 것이 두려워서 군대와 경찰을 총동원해 항일 의병을 철저하게 진압했고, 애국계몽운동을 이끌며 국권 수호를 외쳤던 애국 인사들을 미리 투옥하거나 협박했습니다. 게다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언론·결사·집회·출판 등의 모든 자유를 박탈해 강제 병합이 어떻게 진행되는지조차 철저하게 비밀에 부쳤습니다. 국치 당일의 고요는 철저한 은폐의 결과였습니다.

_22장 경술국치 당일은 왜 조용했을까? p. 442



1910년대 국내 독립운동의 또 다른 특징은 참여하는 계층의 저변이 점차 확대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비밀결사나 의병에 참여했던 유생·군인·지식인 외에도 학생·농민·노동자층의 항일 의식이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교사와 학생으로 구성된 비밀결사의 경우, 일제의 민족 교육 탄압책에 저항하면서 항일 민족의식을 더욱 고양시켜 갔습니다. 협성학교의 ‘학우회’, 숭의학교와 기전학교의 ‘송죽형제회’, 경성고등보통학교의 ‘조선물산장려계’, 숭실학교의 ‘조선국민회’ 등 학생들이 결성한 비밀결사들은 교육을 통해 민족의식을 키우는 일에 앞장섰으며, 자금을 모아 독립운동을 후원하는 활동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또한 농민들은 토지조사사업으로 경작권을 빼앗기고 지주제 강화로 생존마저 위태로워지자 저항에 나섰습니다. 처음 농민들의 저항은 자연스럽게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해 달라는 수준이었지만, 1910년대 후반부터는 주재소·세무소·면사무소 등 일제의 통치기관을 습격할 정도로 정치적 색채가 강해졌습니다.

_26장 식민지 조선에서 우리는 어떻게 싸웠을까? p. 521



3·1운동의 출발은 파리강화회의나 고종의 국장 등 특정한 계기에서 비롯되었지만, 이 운동이 한반도 전역에서 장기간 지속되고 전 계층이 동참할 수 있었던 까닭은 일제와 맞서 싸웠던 1910년대 국내외의 모든 조직이 간직한 내적 역량 때문이었습니다. 초기에 만세 운동을 주도했던 종교인과 학생 들의 영향력이 점차 약해지면서 농민과 노동자 들이 시위를 주도해 갔고, 마지막 단계에서는 어부·장꾼·지게꾼·인력거꾼·기생·거지 등 전 계층이 모두 참여하는 단계로 나아갑니다.

_28장 무엇이 3·1운동을 ‘세계적인 경이’로 만들었는가? p. 558



3·1운동이 혁명으로 평가되었던 것은 중국인의 평가나 5·4운동과의 연계성 때문만이 아닙니다. 3·1운동의 과정과 결과는 모두 혁명적 특징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3·1운동은 이념과 계급의 차이를 초월해 전 민족이 함께 전개한 항일운동이었고, 황제와 지배층이 지켜 내지 못한 나라를 민중의 힘으로 되찾겠다는 자각을 통해 민중이 역사의 주체로 떠오르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고종의 서거와 함께 시작된 이 운동을 통해 한국인들은 왕국이나 제국이 아닌 ‘민국’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했고, 이것이 공화주의에 입각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토대를 형성했습니다. 3·1운동을 통해 한국사에서 최초로 인민의 평등과 자유를 보장하는 주권재민의 근대 국민국가를 출범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_29장 대한민국은 언제, 어떻게 탄생했는가? p. 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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